베이컨 쓰면 정통 까르보나라가 아닌가?

정통 까르보나라, 관찰레가 없을 땐 베이컨을 써도 될까?

“까르보나라는 무조건 관찰레로 만들어야 한다.”

요리 커뮤니티나 SNS에서 자주 들리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 까르보나라 레시피’는 생각보다 아주 오래된 전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지금의 형태로 정착했죠.
(근데 뭐 까르보나라만 그러하냐? 하면 전혀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전통 요리’라는 것은 대부분 사실 역사가 200년도 되지 않는답니다… 물론 그와 비슷하거나 조상뻘 되는 ‘전신’ 은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지언정, 현재의 레시피로 굳어진 것은 근/현대의 일이라는 것이죠.)

즉, 그 이전에는 관찰레(Guanciale)가 아니라 판체타(Pancetta)나 크림(panna)을 넣은 버전도 공존했습니다.

이탈리아 셰프 루치아노 모노실리오의 까르보나라, 진한 노른자 소스와 페코리노 치즈가 어우러진 정통 로마식 파스타
루치아노 모노실리오 셰프의 시그니처 까르보나라.
관찰레의 지방과 계란 노른자를 완벽히 유화시켜 만든 로마 정통 스타일로,
페코리노 로마노와 후추 향이 조화된다.

1️⃣ 까르보나라 레시피의 역사 — 생각보다 젊은 전통

까르보나라는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로마에서 등장한 요리입니다. 전쟁 당시 미군이 공급한 “베이컨”과 “계란가루”가 이탈리아 병사와 요리인들에게 새로운 조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시기 등장한 가장 초기 문헌 중 하나는 1954년 로마의 요리잡지 La Cucina Italiana이며, 여기엔 관찰레 대신 판체타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1960~70년대에 이르러 로마 전통 요리로 정착하면서 관찰레(돼지 볼살)이 재료로 고정되고, 크림(panna)은 빠집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재료 조합 — 관찰레, 계란, 페코리노 로마노, 후추 — 가 자리 잡았습니다. 즉, “정통”은 시대가 만든 약속일 뿐,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2️⃣ 재료별로 달라지는 까르보나라의 맛

🔹 관찰레 (Guanciale)

볼살 부위로 지방이 두껍고 감칠맛이 강합니다. 열을 가하면 지방이 서서히 녹아 계란 소스와 완전히 유화되며, 입 안에서 버터와 치즈의 중간 같은 질감을 만듭니다. 향이 강하고, 짠맛보다 단맛과 고소함이 두드러집니다. 결과적으로 소스가 진하고 점성이 높습니다.

🔹 판체타 (Pancetta)

복부살을 염지해 건조한 것으로, 관찰레보다 향은 약하지만 지방의 밸런스가 좋아 좀 더 깔끔하고 덜 짜게 느껴집니다. 단, 판체타는 훈연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계란 소스와 잘 어우러지지만, 관찰레처럼 강한 향의 여운은 없습니다.

🔹 베이컨 (Bacon)

문제의 주인공입니다. 미국식 베이컨은 염지 후 훈연(smoking)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훈연향과 단짠 조합이 강해 계란과 치즈의 미묘한 풍미를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대부분 습식 염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익힐 때 수분이 많이 나오고, 소스가 덜 농축되며 약간 물컹한 질감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 관찰레: 풍미 깊고 점성이 높음 (정통)
  • 판체타: 부드럽고 깔끔함 (정통의 대체 가능)
  • 베이컨: 스모키하고 단짠, 소스 균형 무너짐 (비추천)

3️⃣ 왜 ‘크림(panna)’은 빠졌을까?

초기 까르보나라 레시피에는 크림이 들어간 버전이 꽤 많았습니다. 1950~70년대 가정 요리책이나 북부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크림을 넣어 소스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이 널리 쓰였죠. 하지만 로마의 전통주의자들은 이를 ‘이단(heresy)’이라 여겼습니다. 1980년대 이후 Accademia Italiana della Cucina 가 정통 레시피를 표준화하면서 크림은 완전히 제외되었습니다.

즉, 오늘날의 ‘정통 까르보나라’는 1980년대 이후의 합의이지, 고대 로마의 전통은 아닙니다.


4️⃣ 문화적 맥락 — 이탈리아 할머니가 용납할까?

만약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골목 식당에서 “Can I have it with bacon?”이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셰프가 눈살을 찌푸릴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관찰레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로마의 맛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탈리아 가정에서도 관찰레를 구할 수 없을 땐 판체타를 쓰기도 합니다. 즉, 판체타는 허용 범위 안이지만 베이컨은 거의 금기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해외나 한국에서는 훈연이 약한 unsmoked bacon이나 streaky bacon을 사용하면 그나마 유사한 질감과 지방감을 낼 수 있습니다. 다만 향이 강한 일반 베이컨은 까르보나라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변수입니다.


🍝 결론 — 정통은 ‘고정된 맛’이 아니라 ‘균형의 미학’

까르보나라는 80년이 채 안 된 젊은 요리입니다. 그 안에는 전쟁, 식량, 지역 문화가 섞여 있죠. 관찰레가 없을 때 판체타를 쓰는 건 현실적 대안이지만, 베이컨을 쓰는 순간 향의 중심이 바뀝니다. 결국 ‘정통’이란 재료의 고집이 아니라, 지방·단백질·열의 균형을 이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즉, 이탈리안 할머니는 말할 겁니다. “관찰레가 없다면 판체타를 쓰렴. 하지만 베이컨은… 그건 다른 요리지.”


관찰레, 판체타, 베이컨의 차이를 조금 더 알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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